다소미

HD역사스페셜 32화 - 고려부인, 염경애


확인돼 이목을 끌었다. 염경애 묘지석이다. 아내의 이름은 엄경애 이다.

고려.조선엔 일반적으로 여성이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

이 묘지석엔 염경애의 가족관계가 나와있다. 염경애의 가문은 권세있는 귀족가문이었다.

묘지석엔 아내를 잃은 슬픔과 아내의 생전 성품등을 회고하고있다. 

마을 곳곳엔 효자비, 효암등 최루백을 기리고 있고 조선시대 삼강행실도등에도 기록하고 있다.

최루백은 청요직관료로서 왕을 보좌했다. 그런데 귀족가문인 염경애가 지방향리 출신인

최루백과 어떻게 결혼했을까? 고려때는 과거급제자가 가장 중요한 혼인조건이었다.

고려와 조선초엔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염경애 묘지석을 보면 그들의 생활이

풍요롭지 않았음을 알수있다. 고려때 하급관료는 넉넉하지 못했다.

최루백의 묘지석엔 그가 염경애 외에 2명의 부인이 있었음을 알수있다. 재혼을 한것인지

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고려때 혼인제도는 처가살이가 일반화되었고 다처를 취하는것이

힘들었다. 1부1처제가 일반화되었다. 최루백은 재혼을 한것이다. 고려때는 조선과 달리

여성의 재혼이 자유로웠다. 또 여성이 이혼하는것도 어렵지만 가능했다.  다처풍습은

원간섭기에 들어온것이다. 최루백의 넷째아들 ' 단지'는 출가를 했다가 다시 관직에 나간다.

당시 귀족의 아들이 출가하는것은 흔한것이었다. 고려때 승려의 지위가 높았음을 알수있다.

아무나 승려가 될수있는건 아니었다. 승과를 거처야 승직을 받을수있었다.

무덤의 주인을 알게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윤관의 묘도 이러한 경우다. 땅 속에 묘지석을 묻는것은

중국의 풍습이다. 중앙에서 비석을 금하자 고려시대때 묘지석이 유행하였다. 또 고려귀족들은

개성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고려때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게 일반화되어있었다.

석관안에 부장품과 화장한 뼈를 넣고 내부에 성수도를 , 외부에 사신도를 그려 사후세계를 생각했다.

염경애 묘지석 뒤에도 백호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석관의 한면을 이룬것이다.

그것이 묘지석인것이다 .

  


수♥란♥현의 house 사랑깊은약속 곰돌이의 아틀리에 J왁스몰 쭈야공주 나라 모작탈모센터 두유베리 현실은 시궁창 동신 스크류 로보코리아
2010/09/02 12:13 2010/09/02 12:13
top

Leave a comment..